스포츠 자체가 도깨비 같다 - 김연아 경기를 보며

내가 태어나던 해에 열렸던 82년 세계선수권 야구대회 그 당시 경기는 좀 철이 들어서 지난 대회동영상을 봤지만, 정말 그렇게 눈깔에서 눈물을 뽑아냈던 경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일본과의 결승전은 '혁명' 그 자체였다.

넘사벽과도 같은 일, 물론 일본 야구팀이 사회인 야구팀으로 구성되었고, 우리는 당시 원년 프로야구 멤버들이 대거 참여했다고는 하나 어차피 창단 첫 해이므로 많은 기술적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고, 또 그 당시 일본은 사회인 야구팀이라고 해도 에이스들만을 꼽자면 왠만한 프로팀 못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어쨌건 2:1로 지고 있던 8회 말, 일본은 김재박을 거르려고 했으나 김재박은 용납하지 않고 방망이 끝자루를 쥐고 펄쩍 뛰어 올라! 누가 봐도 고의사구로 보이는 볼을 때려버렸다. 이후 한국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할 해결사 한대화의 역전 쓰리런!

이후 날 뜨겁도록 달아오르게 만든 것은, 98년 프랑스월드컵 진출을 위한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운명의 97년의 한일전, 동경국립경기장의 5만에 이르는 울트라닛폰의 푸른 물결은 이방인들에게 있어선 공포 그 자체였다. 우리 교민들이 5천명 정도 모여 있었지만 경기전의 기세는 완전하게 '잡아먹을 듯한' 분위기 였다.

게다가 후반 20분 야마구치에게 골을 허용하면서 분위기는 더더욱 광적으로 변해갔다. 우리 교민들의 사물패를 동원해 응원의 총력전을 펼쳤지만 왠지 힘이 빠져보였다. 일본의 영웅 이하라와 미우라 , 아시아 최고의 GK 가와구치, 귀화선수 로페즈가 버티는 전력은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 그 어떤 팀이 와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전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은 그 환경에서 일본의 밀집수비를 무너뜨리기 위해 좌우에서 분전했다.

그 결과는 서정원의 헤딩 동점! 그래도 일본의 기세는 수그러 들 줄 몰랐다. 일본의 응원단들은 더더욱 과열차게 잡아먹을 듯한 야유와 함성을 질렀다. 그 순간 MF 부근에서 슬금슬금 치고 들어가던 이민성이 갑자기 슛을 날렸는데.. 난 사실 이것이 가와구치의 실력이라면 능히 막힐 줄 알았다. 그러나 공은 무엇에 홀린 듯 일본측의 골대로 쳐박혔으며 가와구치도 뭐에 홀린 듯 순간 공의 흐름을 놓쳐버렸다.

이민성!!!!! 후지산이!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 순간 지옥과도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 때 분위기를 말로 표현하자면 '사람이들 썰물을 타고 빠져나가는 듯한' 분위기였다고 해야 하나? 그 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민성의 이름을 불렀는지 모른다. 혹자들은 이민성을 멕시코전과 네덜란드전의 대패의 원흉으로도 생각하지만, 최소 이민성의 이름은 그 날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만큼은 영웅 그 자체였다.(당시 일본대표팀 가모슈 감독이 그 날의 충격으로 턱이 몇 차례나 빠졌다고 하던데)

일본을 격추 시켰다. 그래.. 딱 이 표현이 들어맞는다. '격추!'

여전히 그 날의 감동만 생각하면 머리가 흥분으로 인해 아찔하지만 일단 한 타이밍 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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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김연아의 경기를 보면서 더더욱 드는 생각이 있었다. '아 정말 한국 스포츠는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라고, 박태환도 그렇고 김연아도 그렇고..  생활체육 쪽에서는 어느정도 활성화가 되있지만 여전히 비인기 종목으로 대접받는 수영이나 피겨스케이트 쪽에서 슬슬 동양인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핸디캡을 극복한 '새로운 세대' 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김연아에만 치우치기는 그렇다. 나도 피겨를 잘 알았던 것도 아니고 어찌 보면 김연아의 경기를 챙겨 보다가 다른 선수들의 경기도 같이 보게 되고, 룰도 알게 되고 채점방식 같은것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오늘 경기를 보며 느낀건 그 동안 김연아와 함께 출전했던 다른 외국 선수들도 기량이 많이 발전했더라, 그들도 서서히 경험을 쌓아 나가다 보면 김연아의 세대와 함께 좋은 경쟁을 펼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꼭 김연아 뿐만은 아니지만, 이런 성적들이나 깜짝 놀랄만한 소식들을 접하다 보면 참 우리나라 스포츠는 도깨비 같다는 생각이 안들래야 안들 수가 없다. 엘리트 체육의 비애 라는 비아냥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니다. 이건 분명 뭔가가 있다. 제대로 된 연습시설 하나 없이 지원 없이 이 모든 것을 해 냈다는 점도 신기하기도 하고, 무한도전을 통해 룰이나 시스템, 선수들을 대강 알게 된 봅슬레이의 경우도 미국에서 쿨러닝의 신화를 재현해 냈지 않은가? 평창에 봅슬레이 지상연습시설이 생긴다는 소식은 반길만 하지만.. 

봅슬레이 경기장도 없고, 봅슬레이 기체 자체가 연습에 턱없이 모자라 일본에 가서 내려간 기체를 다시 올려서 타고... 또 내려간 기체를 올려서 타고! 일본팀을 누른 뒤 세계대회에 나가 3위를 차지해 버리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과연 이것이 스포츠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한 범주일까? 그 이상일까?

지난 해 베이징의 올림픽 야구는 시작 전 부터 '폐지론' 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보여줬다. 세계의 그 반대론자들에게 '눈구멍 후벼 파고 똑바로 봐라! 야구는 이렇게 재미있고 끝내주는 경기야!' 라고 가르쳐 주었다. 반면 장미란은 무솽솽이라는 라이벌이 불참했지만 자만하지 않은 가운데 그야말로 세계를 화끈하게, 그리고 시원하게~ 들어버렸다. 너무나 시원한 금메달, 언제나 우리의 테마였던 아슬아슬한 승부 끝에 관객이건 선수건 피땀을 흘려야 얻을 수 있는게 아닌 처음부터 압도적인 힘으로 금메달을 넘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2002년! 나를 홍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월드컵 시즌기간, 그래도 가장 화끈한 경기는 부산진대첩 이었다. 폴란드 전을 앞둔 부산진의 풍경은 전장에 승전보를 울리기 위해서 출사표를 던지고 대장선에 오른 이순신의 모습처럼 비장하고, 엄중한 각오 아래 4만의 붉은 악마가 완벽하게 '붉음' 그 자체로, 유럽의 레드데빌 폴란드에게 보여주었다.

침묵의 응원, 그러나 한 순간 터져 나오는 절제된 한 목소리의 응원! 한 치의 잡담이나 바늘 끝의 오차조차 없었던 4만의 붉은 악마는 그 날 부산진에 거대한 장사진을 펴고 폴란드를 몰아 붙였으며 황선홍과 유상철이 포격을 감행 해 폴란드를 격파 아니 완파해 버렸다. 이 날 폴란드 선수들은 하나같이 부산에서 '공포' 를 느꼈다고 했다.

이건 대형사고의 시작이었다. 그래.. 시작일 뿐이었다. 이후 16강전에서 월드컵 사상 가장 극적인 승부 베스트 10 안에 꼽힌 한국과 이태리전! 그 날 경기가 끝나고 세계 언론은 안정환을 하나같이 '반지의 제왕' 이라고 칭했다. 또 예선에서는 유럽 최고의 강호이자 당시 우승후보로도 손색이 없었던 무적함대 포르투갈을 박지성은 단 한 방의 어뢰로 격추시켜 버렸다. 박지성의 '쉿!' 세레모니는 2002 월드컵 최고의 골세레모니로도 꼽혔을 정도로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정말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던 세레모니 였다)

아름다운 8강, 그 더운 날 광주의 오후 우리는 홍대의 클럽에 모여서 무제한으로 제공된 맥주에 잔을 채워 점심부터 열렬하게 한국을 응원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때 우리가 그 장소에서 한국을 응원했다는 점! 그러나 경기는 일진일퇴의 공방전, 피를 서로가 잔뜩 말리는 분위기에서 열사병으로 인해 여성 몇 명이 쓰러져 나갔을 정도로 홍대 근방에서 TV가 있는 곳 앞에는 사람들이 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홍명보가 마지막 승부를 끝내고 양 팔을 벌리며 날아오를 때 우리는 미친듯이 홍명보의 마지막 포즈를 취한 채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끝나기 1분 전만 해도 사람 하나 없이 적막했던 홍대가 순식간에 사람의 물결로 뒤덮여 버렸다. 버스는 운행 GG를 선언했고, 교통 경찰도 태극기를 흔들었다. 곳곳에서 개조된 SUV 가 '빠뻐빠~ 빠빵!" 하는 클랙션을 울려 댔으며, 그에 화답하듯 지나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대~ 한 민국!' 을 외쳤다.

그리고 감동의 '꿈은 이루어진다' 까지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을 거리로 끌어낸 열기는 언제나 축구에 죽어 못사는 다른 국가들을 놀라게 했고, 그들은 우리를 '도깨비' 라고 불렀다.

도깨비..

88 올림픽 개막식 당시 식전행사의 전반부가 마무리 되고 삐잉~ 하는 내리쬐는 햇살의 효과음과 동시에 모든 시선이 경기장의 1시 출입구로 향했다. 윤태웅 군이 굴렁쇠를 굴리며 넓은 주경기장을 가로질러 내려가는 모습, 중간에 멈춰서 손을 한 번 흔들고 다시 굴렁쇠를 굴려가는, 지금까지 개최된 모든 올림픽의 행사테마를 살펴 봐도 이 이상 올림픽을 잘 설명한 것은 없었다(유감스럽지만 우리보다는 외국에서 이 사실을 더 많이 인정해 줬다는 것도 조금은 부끄럽다)

그 한 방의 뇌리에 남는 기억

최근의 뇌리에 남는 기억을 정리해 보자면 WBC 결승전에서 아쉬운 패배를 당했지만 야구는 9회말 2아웃 부터 라는 것을 우리 선수들이 입증해 준 것

그리고 연습방해 해프닝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을 김연아는 이번 피겨에 출전하기 전 '야구대표팀 오빠들 수고 많으셨어요! 이젠 제 차례입니다' 라는 출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그녀는 보란 듯이 출사표의 약속을 지켜냈다.

<아 진짜..>

더 이상의 뭔 말이 필요하랴?


아직 피겨경기가 마무리 된 것은 아니니 내일도 최선을 다해주길 기원하며

by 야옹이 | 2009/03/28 13:10 | 雜形滿談 | 트랙백 | 덧글(10)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3/28 13:21
뭉클합니다.
Commented by 야옹이 at 2009/03/29 12:30
쿠키토끼님 'ㅅ'
Commented by 에루 at 2009/03/28 14:01
확실히 우리나라는 좀 이상하긴해요;;; 딱히 스포츠만으로 국한짓지 않아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던;;;
Commented by 야옹이 at 2009/03/29 12:30
'ㅅ' 마쟈용
Commented by 케이 at 2009/03/28 16:45
김연아 세계신에 대해서 사람들 반응이 궁금해서 들어왔던차에 읽게 되었습니다..
저도 에루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요 우리나라;;;
묘하게 말도 안되는 일 같은게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느낌이라.ㅋㅋ
글 잘 읽고갑니다.
Commented by 야옹이 at 2009/03/29 12:31
요기는 블랙홀 'ㅅ'/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9/03/28 17:18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는 프로 선수는 없었습니다. 국대선수들은 프로를 못 가게 막아놓았거든요. 그래서 이 선수들은 다음해에 프로야구 선수가 되죠.
Commented by 야옹이 at 2009/03/28 18:18
오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듀나스 at 2009/03/28 18:29
게임많이 하던 누군가가 그러더라구요. "영웅비율이 쩌는 나라"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00퍼 공감합니다.ㅋㅋㅋㅋ
Commented by 야옹이 at 2009/03/29 12:31
저는 오크할래용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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